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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의 설립과 활동

초록/요약 도움말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제휴․합작한 국내 최대의 항일단체였다. 이는 1927년 5월부터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27년 12월에 100개, 1928년 2월에는 123개, 1929년에 최대 144개의 지회가 설립되었다. 강원도는 총 7개 군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되었는데, 영서지역의 원주․양구와 영동지역의 양양․강릉․고성․울진․삼척 등이었다. 당시 강원지역에 설립되었던 신간회 지회는 대부분 영동지역이었고, 신간회 운동도 영동지역 지회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다.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 설립은 대체로 청년단체들이 주도하였다. 영동지역은 태백산맥 이동과 동해안 사이에 위치하여 지세가 좁고 남북방향으로 길다. 당시 영동지역은 농경지로 사용할 수 있는 평야 지대가 협소하여 半農半漁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가 많았다. 이러한 사회경제적인 조건은 영동지역 내 노동․농민운동과 청년단체 운동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영동지역에 청년단체가 본격적으로 결성된 시기는 1919년 전후이다. 대표적 단체로는 강릉기독교청년회․양양호산청년회․고성금강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이 청년단체들은 통합과정을 거쳐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신간회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표방하고 결성되었듯이,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도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참여하면서 지역 단체의 구심기관으로 발족하였다. 다만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는 주로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였다. 그 이유는 함경도와 접하며, 동해안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된 국제항로가 개설된 점 등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사상이 비교적 빠르게 영동지역에 유입되었고, 신간회 지회 설립 전부터 사회주의 계열에 의한 노동 및 사회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신간회 지회가 해소된 이후에도 영동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해방 직후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영동지역의 정국을 주도하는 계기가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참여하였는데,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기 이전 영동지역은 향교와 사립학교 등을 중심으로 유교 사상의 영향력이 강했다. 이에 1920년대 이전에는 지역 유지 등 민족주의자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신간회에 참여하여 신간회 지회 설립 초기에는 주요 간부직을 맡았다.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는 계몽․생활수호․반봉건 등의 사회․정치개혁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에 의한 억압과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그 예로 양양지회에서는 일본인 번영회가 어로 사업의 이권을 탈취하려 하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강릉지회는 당시 강릉의 최대 지주였던 선교장 주인 이근우에게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기도 했다. 울진지회는 문맹 퇴치 등 지역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으며, 전근대 폐쇄적인 문화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신간회는 중앙 지도부의 우경화와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으로 설립된 지 4년 만인 1931년 해소되었다. 양양지회의 경우에는 신간회 해소에 대한 구체적인 성명서를 요구하며 해소에 반대하였으며, 강릉지회는 ‘신간회 해소 문제 연구부’를 조직하여 해소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1931년 5월 15일 개최한 신간회 전국전체대회에서 해소론이 가결되면서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도 자연스럽게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해소 이후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적색농민조합 등 혁명적 농민운동을 전개하며 지역 내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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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도움말

Ⅰ. 서론 1

Ⅱ.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의 설립 배경과 과정 7
1. 신간회 지회의 설립 배경 7
2. 신간회 지회의 설립 과정 15

Ⅲ.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 조직원의 사상적 계열 23
1. 사회주의 계열 24
2. 민족주의 계열 33

Ⅳ. 영동지역 신간회 지회의 활동과 해소 37
1. 신간회 지회의 주요 활동 37
2. 신간회 지회의 해소 과정 47

Ⅴ. 결론 52


부록 55
참고문헌 72
Abstract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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